12월 9일 새벽말씀
전도서 7:1~14
전도서 7장 말씀은 전도서의 잠언이라고 불리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반복되는 어구가있는데 무엇이 무엇보다 낫다.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 라고하는 내용이 1~12절까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무엇이 무엇보다 나은지 그것을 구분하고
아는
것이 지혜죠.
엊그제도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삶을 잠시 나누었지만
선택을 놓고 왜 고민합니까
무엇이 더 나은지 알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처럼 어떤것이
어떤것보다 더 영원하고 중요하다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문에 무엇이 무엇보다 나은지 반복해서 나오는데요.
이 지혜자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것까지 간파하는겁니다.
또 진정으로 무엇이 유익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4절까지는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참 복되고 유익이다.
1절에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2절에 보시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출생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고 잔칫집에 있는 것보다
초상집에 있는 것이 낫고 참된 지혜자는 잔칫집이 아니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족, 지인들께서 소천 하실때에 장례식장에 가면 저 자리에 내가 누울 날이 있겠구나. 그것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끝을 보게 되고 우리의 마지막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지요.
오늘의 첫번째 말씀은 죽음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빌립은 매일 정확한 시간에 들어와서
'왕은 반드시 죽습니다' 라고 말해주는 시종을 두었다고 합니다.
무한의 권력과 재산을 가진 자신에게 삶의 유한성, 나의 끝을
기억하게 했다는 겁니다.
중세 수도원에서도 서로 수도사들이 아침에 만나 인사할 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입니다.
새벽에 만나자마자 당신 죽습니다. 이것이 인사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본문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마지막을 생각하라.
마지막을 기억하라 너의 유한함을 인지하라.
왜냐하면 삶의 유한함 나의 유한함을 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더 의미있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삶의 작음을 알때에 우리는 비로소 삶의 모든 것을
아우르시는 크신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이죠.
마지막을 기억하는 것은 현실의 삶을 더 의미있게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나의 크기와 하나님의 크기는
정확히 반비례입니다.
내가 커지면 하나님은 작아지고 내가 작아지면 하나님은
커집니다. 내 마음이 부유해지면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이 줄어들고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이 마련됩니다.
본문의 말씀은 너는 죽는다. 너의 마지막을 기억해라.
너는 유한하다 입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해질수록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공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지혜가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죠.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말씀이 있었지요.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이 삶의 지혜, 진리 인데요.
오늘 마지막 본문인 13, 14절에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이 중요한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하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보는 겁니다. 존재하시면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며
지혜의 근본이고 모든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네 발로 걷는 많은 짐승들이 있는데요.
그 네발 짐승이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 안되는 것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거랍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두발로 걷는 인간에게 허락된
행동의 양식인 겁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는게 어렵지 않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도 보고 영적으로도 보는 겁니다.
길이 막혔을 때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두울 수 있을까 사방이 온통 어둠으로 가득할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3절에 하나님께서 굽게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곧게 펴주기시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굽게도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곧게 해 주시기를 바라지만 때로는 삶을 굽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이스라엘에 허락하기도 하시지만 광야,
척박한 인생 40년을 허락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들어갈 때 만이 아니라 광야 길을
걸을 때에도 그들을 바라보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죠.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왜 춥고 곤고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삶을 굽게도 곧게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면 됩니다.
즐거워하고 예배하면 됩니다. 그리고 곤고한 날에는
주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죠.
때마다 주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 삶이 곧을 때에도 굽을 때에도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곧을 때에만 하나님이 일하신다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굽게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가기 위해서겠지요.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떤 때입니까. 형통한 때입니까.
곤고한 때입니까. 하나님은 형통속에서도 곤고함 속에서도
존재하시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형통과 곤고함,
인생의 여름과 겨울, 성공과 실패, 웃음과 눈물, 기쁨과 고통을
통해서 우리 삶을 아름답고 단단하게 만들어 가시죠.
저에게는 공군중앙교회 새벽예배가 오늘이 마지막이고
이번 주일이 이임이고 이동하고 나서 2주 뒤에는
이스라엘 연수를 앞두고 있습니다. 저에게 누군가 형통하십니까 곤고하십니까 묻는다면 저는 후자입니다.
곤고합니다. 분주합니다. 그렇게 밖에 대답이 안될것 같습니다. 저도 최근에 왜 이렇게 분주할까 뭐가 안잡힌다.
이럴때면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않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니구나 하나님은
이렇게 분주할 때에도 곤고할 때에도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게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일을 하시고 나를 만들어가시는구나 느낍니다.
여러분의 삶도 왜 이렇게 곤고하지? 분주하지?
뭐가 이렇게 안풀리지? 한다면 그게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늘 말씀처럼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형통할 때는 기뻐하십시요.
곤고할 때는 되돌아 보십시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복된 삶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