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 말씀은(욥기21:17-34)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제목의 말씀으로 상고하겠습니다.
->2차 변론이 진행하는 가운데 까닭 없는 고통가운데 있는 욥에게 세 친구들의 결론과도 같은 주장의 말입니다.
->(욥기20:27-29)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소발의 말입니다.
->욥이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행동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보응으로 고통가운데 내모신 것이다 말합니다.
->이들의 악인론에 대한 욥의 반론입니다.
->(욥기21: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질문합니다.
->악인의 고통을 형통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욥기21:14-16)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 욥이 말합니다.
->악인의 형통으로 알 수 있듯이 고통과 형통은 하나님의 보응의 결과가 아니다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심판하시어 고통과 형통을 주신다는 인과와 보응의 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묵상하면서 욥의 편에 서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사고방식, 신관, 신앙관, 세계관은 세 친구들 편에 더 가깝게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남은 받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는 말을 주의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은혜, 하나님의 자녀된 복은 얼마든지 얘기해도 되지만 그 외에 세상적인 기준으로 축복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복이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반드시 그렇지 못한 사람, 반대의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남이 시기할 수 있으니 기쁨을 감추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욥기21:22-2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욥이 말합니다.
->욥은 어떤 사람의 형통과 어떤 사람의 고통을 결정짓는 차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보응은 아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욥의 주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제한 주장이기에 주의깊게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욥은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 어떠함을 보시고 형통과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지금 까닭 없는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1:1-3)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되게 하신 것과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고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 오백 겨리, 암나귀 오백 마리, 수많은 종,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하고 으뜸가는 자가 된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며, 하나님은 보응의 원리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 오직 은혜로 자신에 대하여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미 배웠던 것입니다.
->(욥기21:22) '하나님께서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의 의미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을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고통과 형통의 문제에 대하여 감히 설명할 수 없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통과 형통의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감사할만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렵고 힘겨운 일이라면 하나님을 의뢰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고통과 형통이 뒤섞인 불완전한 세상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누구나 형통과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욥의 이야기가 허무감으로 다가 올 수도 있습니다.
->'또한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엇하려고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회의감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욥기21:15) '~우기가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는 욥이 예로 들었던 악인들이 하는 말, 불신앙의 말이 욥의 반론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솔직한 심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믿음의 여정가운데 언젠가는 맞닥뜨려야하는 순간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기도하고 직접 경험한 순간들이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고통과 형통이 뒤섞인 현실과 형통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고통의 문제 앞에서 과연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 과정 중에 기도는 왜 해야 할까' 한번쯤 깊이 생각하며, 답을 찾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빌립보서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 구절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착각입니다.
->이 구절은 반드시 (빌립보서4:12)과 세트로 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가운데 비천과 풍부, 고통과 형통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일체의 비결이 있다'고 말하는 바울은 자신을 결박하고 심문한 헤롯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말합니다.
->(사도행전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는 말을 실제 삶가운데 증명해 보였습니다.
->바울의 신앙과 영성이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요?
->바울이 신문장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기 전에 했던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26:22-2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는 소식, 그의 삶의 일체의 비결을 가져다 준것은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일체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부터 구원받은 삶, 이제는 성령을 따라서 주님의 마음으로 죄를 이기는 삶, 이 세상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죄의 기준과 이치에 대하여 주님의 마음과 원리로 이기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 그 삶이 곧 그로하여금 비천과 풍부, 형통과 고통에 처할 줄 알게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형통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형통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고 구원받은 삶을 누리는 것임을 바르게 정립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신앙안에서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우리의 기도와 묵상의 자리에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단순히 오늘의 형통을 바라면서 기도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다른 어떤 기도의 제목들이 있는지를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고민하실 수 있기를 바라고 성령께서 가르쳐주실 때 '아멘'하심으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성령께서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삶을 우리에게 응답으로 누리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