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르우(Reu)
뜻: 친구 혹은 이웃/friend or neighbor 요약: 르우는 아담 이후 1787년에 출생하였습니다. 32세에 스룩을 낳고 2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39세(아담 이후 2026년)에 죽었습니다(창11:20-21, 대상1:25-26). 노아와는 219년 동시대에 살았습니다. 누가복음의 족보에 ‘르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눅3:35). |
르우의 어원은 ‘(가축을) 돌보거나 방목하는 목초지’를 뜻하는 명사 ‘레이’에서, 그리고 ‘방목하다, 기르다, 사귀다, 특별한 친구가 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라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벨렉은 신앙의 조상 에벨이 떠난 후 마땅한 신앙적 지도가 없는 불안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기의 아들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엮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소원하면서 ‘르우’라고 이름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부모로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일을 먼저 가르치기보다, 세상 사람들처럼 인간관계에서 최고가 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1. 르우는 유목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Reu probably lived a nomardic life.
르우의 어원 가운데 ‘방목하다, 기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직업이 유목 생활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대 농경 사회의 생계유지는 가축을 기르는 일과 농사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유목 생활의 특징은 물이나 목초지를 찾아 가축을 이끌고 이동 생활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봄, 가을에 목초지를 찾아 대이동을 하고, 방목지 안에서도 또 소 이동을 합니다. 당시에는 바벨탑 사건 이후 대이동이 있었을 것이므로 이들은 유목 생활로써 생계의 터전을 잡아갔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애쓴 흔적이 그 이름 속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초원을 찾아 이동하면서 가축을 방목하여 기르고, 그러면서 자기들만의 생활 영역을 확보하여 나갔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도 거처할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할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가르켜 성경에서는 ‘나그네’(벧전 2:11), ‘우거하는 자’(대상29:15)라고 하였습니다. ‘우거’는 ‘잠시 머물러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영원한 본향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히11:13-16).
2. 르우는 인간적인 친구 관계에 충실했습니다.
Reu was faithful in his friendships with other people.
르우의 어원 가운데 ‘사귀다, 특별한 친구가 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벨탑 전에는 모두가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었으며, 하나의 언어로만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1:1 “온 땅에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어리석은 반역에 대한 벌로 언어를 혼란시켰으며, 그 결과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의사소통의 매개체인 언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의 혼란이 인류에게 가져온 불편과 장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언어는 일상적인 대화뿐만 아니라 사고(思考) 자체의 결정적 영향권자이기 때문에, 언어의 차이는 결국 사고방식의 차이까지 가져와 그 혼란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컸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언어 혼란으로 상호간의 이질감, 오해, 적대감을 심화시켜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바벨탑 건설을 무효화시켰습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비슷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찾아 여기저기로 인류의 대이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몇몇 사람들이 어울리고 사귀면서 새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 안에서 생존을 위해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사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해관계, 유대관계, 친분관계를 다지는 일은 우선적으로 필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언어가 불편했던 때이니만큼,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영이 통하는 특별한 친구가 가장 필요했던 시기였음이 그 이름의 뜻이 비추고 있는 당시 시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빠진 인간적인 친구 관계는 결국 성도의 발목을 땅에 묶어 두려는 사단의 계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약4:4). 만일 르우가 위에 계신 하나님과 손을 잡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눈을 돌렸다면, 이 땅의 인간관계에 붙잡혀 전전긍긍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같이 그 땅을 떠나 나그네로서 참된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져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공동체의 힘을 키우고, 삶의 터전과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보이지 않는 죄악의 성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디 가나 죄짓는 일에 익숙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도전하고 범죄할 목적으로 전보다 더 뭉치기 시작하고 그 세력을 키워나간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 물이류취(物以類聚)라는 옛 성인들의 말과 같이 어둠의 종자들, 악의 세력들은 언제나 그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재빠르게 죄악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3. 참성도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A true believer must be worthy of being called a “friend of God.”
물론 르우와 같은 시기 즈음에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신앙을 지키던 에벨과 셈 계열의 조상들은 그 곳을 떠나 유브라데 강을 건너 거룩한 신앙 공동체(에블라 왕국)를 세웠을 것입니다. 에벨을 따라 나서지 않고 강 이편에 살고 있었던 벨렉과 그 후손들은 그렇게 떠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적인 우상 공동체 속에서 그들은 온전한 신앙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브라함 시대에 벌써 경건한 셈 자손들조차 시대의 조류를 따라 우상을 섬기는 등 부패한 모습으로 완전히 전락하고 말았습니다(수24:2, 14).
그러한 환경 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죄악이 관영했던 시대에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게 하신 하나님은 또다시 그 죄악의 온상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말씀을 좇아, 고향 산천의 모든 생활 기반을 포기하고, 친척과 친구 등 모든 인간관계를 미련 없이 청산하였습니다(창12:1, 행7:3). 갈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앞길은 캄캄했지만(히11:8) 위로부터 주신 말씀의 부름을 좇아(창12:4), 나그네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벨렉도, 르우도, 스룩도, 나홀도 감히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아브라함은 결단하고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세상과 벗되기를 포기하고(약4:4) ‘하나님의 친구(벗)’로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하기를 더 갈망하고 소원했기 때문입니다(시25:14).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친구’라는 존귀한 칭호를 받은 자입니다(대하20:7, 사41:8, 약2:23). 오늘 우리는 세상과 친구(벗)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친구(벗)’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