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Jesus Christ’s work of atonement
속죄 사역이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신 구체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속죄 사역은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최절정이요, 기독교 복음의 최고 핵심입니다.
1) 십자가 속죄 사역과 하나님의 섭리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엡1:7, 골1: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신 자들의 완전한 속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요1:29, 히9:26, 요일3:5).
이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벧전1:18-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예정된 것이었음을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누가복음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에 기간 동안 네 차례나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마16:21-28, 17:22-23, 20:17-19, 26:1-2). 그리고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실 때마다, 헬라어 ‘데이’(틀림없다, 꼭 필요하다, 절대적이다, 마땅하다)라는 말로써 십자가의 필연성을 강조하셨습니다(마16:21, 막8:31, 눅9:22, 24:7).
베드로가 이 속죄 사역의 중대성을 깨닫지 못하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단호하게 책망하였습니다(마16:23, 막8:3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고자 하였습니다(요10:17-18). 십자가를 지시기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18:31)라고 하시면서, 제자들 앞에 서서(맘10:32, 눈19:28) 올라가셨습니다. 잡히시던 밤에도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면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에 오르셨습니다(마26:30, 막14:26, 요18:1).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예수님은, “당할 일을 아시고”(요18:4),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자기를 찾는 무리에게 “내노라!”(요18:6) 하시며 당당하게 잡히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는 위급한 순간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 버렸을 때, “이것까지 참으라!”라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 주기도 하셨습니다(눅22:51). 그리고는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3-54) 하시면서, 성경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완전한 화목을 이루시려고(롬5:10-11, 엡2:13-18), 예정된 섭리 속에 ‘십자가 속죄를 통한 구속의 완성’을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진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여 그토록 염원하셨던 인류의 구속을 성취하시고 “다 이루었다”(요19:3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2) 속죄 사역의 예표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죄를 용납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상태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제물을 앞세워 나아가게 하심으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실 속죄 사역을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속죄 사역의 가장 완벽한 그림자는 레위기 16:6-10, 15-22, 26에 나오는 ‘아사셀’ 염소입니다. ‘아사셀’은 ‘내어 놓음’이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두 손으로 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전가합니다.
그 후에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내몰아 무서운 짐승의 밥이 되게 합니다(레16:21-22). 이처럼 아사셀 염소는 택하신 자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아무 죄도 없이 성문 밖으로 쫓겨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예표합니다(히13:12)
구약에서 제물의 첫째 조건은 흠과 티가 없어야 했습니다(출12:5, 29:1, 레1:3, 민6:14, 19:2). 왜냐하면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였기 때문입니다. 헛된 제물, 가증한 제물, 눈먼 희생, 병든 것, 저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사 1:11-17), 이러한 제물을 바치는 자는 저주를 받았습니다(말1:7-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속죄의 어린 양으로 아무런 ‘흠’과 ‘티’가 없고, 아무 죄가 없으신 온전한 제물이셨습니다(벧전1: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벧전2:22), 죄를 알지도 못하시며(고후5:21), 처음부터 죄가 없으시며(요일3:5), 악이 없으신 분입니다(히7:26).
이렇게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만족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확증되었습니다(롬5: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고(갈3:13), 죄를 담당하셨습니다(벧전2:24, 사53:6).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롬3:22-24, 4:25, 고후5:21). 죄와 사망 아래 신음하며 얽매여 있던 인생들에게, 마침내 진정한 자유가 회복되고 영생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롬6:23, 8:1-2).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당하신 수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수난은 피택된 죄인들을 위한 대리적 속죄의 수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33년 생애 전체가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고 걸으신, 실로 힘겨운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33년이라는 짧은 생애 가운데 마지막 1주일에, 모든 악의 세력들이 총동원되어 예수님 한 분을 에워싸 공격했고, 주님은 힘에 지나도록 곤욕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실 때, 세 제자에게 그 무거운 심정을 토로하시며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4:32-34).
마태복음26:37-38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열두 제자 가운데 여덟 제자를 산 밑에 남겨 두고 세 사람만을 특별히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부르셨는데(마26:36, 막14:32), 세 제자는 곤하여 잠들었고, 예수님 홀로 얼굴을 땅에 대고(마26:39), 땅에 엎드려(막14:36), 무릎을 꿇고(눅22:41) 겟세마네 동산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심히 통곡하며(히5:7)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당할 일’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막10:32) 겟세마네 동산에서 육신을 쥐어짜고 마음을 쥐어짜고 영혼을 쥐어짜서 최후로 기도하실 때, 그 고통은 심장이 파열되고 창자가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고통은 십자가 상의 고통의 시작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보시다 못해 하늘로부터 사자를 보내어 예수님을 도우셨고(눅22:43), 주님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습니다(눅22:44).
기도를 마치자 마자 곧바로 들이닥친 군대는(요18:3),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추는 신호에 맞추어 예수님을 강도 잡듯이 붙잡아(마26:55), 끈으로 단단히 묶고(막14:44), 결박하여(요18:12), 마치 짐승을 끌고 가듯이 끌고 갔습니다. 예수님을 안나스(요18:113)에게로, 가야바의 뜰(마26:57-68), 산헤드린 공회(눅22:66)로, 빌라도(막15:1)에게로, 헤롯의 관저(눅23:7-10)로, 빌라도 관정(눅23:11-25)으로 밤새도록 끌고 다니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골고다로 끌고 갔습니다(마27:31, 막15:20, 눅23:26).
안나스에게 심문받으실 때에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쳤으며(요18:22),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하면서 희롱했고, 하속들까지 덩달아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마26:66-68, 막14:64-65).
채찍질을 당하신 후에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총독 관저 뜰 안으로 끌려가 온 군대 앞에서 온갖 희롱을 당하셨습니다(마27:26-30, 막15:15-20, 요19:). 채찍은 보통 굵은 것은 세 가닥, 가는 것은 아홉 가닥으로 끝에 금속(납)이나 뼈가 달려 있어서 한 번 때릴 때마다 살에 박혀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시편 38:3, 7의 예언대로, 채찍 맞은 예수님의 몸은 성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매 맞은 자국마다 갈기갈기 찢어져서 예수님의 등에는 길게 ‘고랑’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시편129:3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추운 새벽(요18:18), 인정사정없이 온몸이 만신창이로 채찍질 당하시고 과도한 출혈로 예수님은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예언대로 뼈가 다 멍이 들고, 금이 가고, 어그러졌기 때문입니다(시22:14). 군인들이 힘겹게 부축하여 세웠을 때, 예수님의 형채는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이지러지셨고, 심하게 부어오른 얼굴과 피로 범벅이 된 그 모습은 실로 사람의 형체가 아니였습니다.
시편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5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이 너무도 혐오스러워서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돌릴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53:3 “...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또한 잔인한 로마 병정들은 조롱하는 뜻으로 왕관을 대신하여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사정없이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희롱하였고(마27:28, 막15:17, 요19:2), 예수님의 성체를 더러운 발로 마구 밟고, 벌레처럼 취급하였습니다(사51:23).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가시관 쓰신 그 머리를 갈대로 쳤습니다(막15:17-19, 요18:2).
마태복음 27:29-30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고 그의 머리를 치더라”
여기 ‘치며’는 손이나 주먹, 발, 작대기, 지팡이, 채찍, 무기 등으로 때리는 것인데, ‘튑토‘의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미완료 과거는 과거의 계속적 행동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로마 군인들은 번갈아 가면서 분이 풀릴 때까지 오래도록 계속 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머리에 깊숙이 박힌 가시 면류관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머리는 그 고통이 더욱 커지고 더 많은 피가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이 고통은 형벌 받아 마땅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받으신 고난이었습니다(사53:5,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수를 믿노라 하는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외면하고, 거절하며, 심지어 중심에 멸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라고 했던 피맺힌 탄식,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가슴속에서 뼈저리게 되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4)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속죄 사역
마치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흉악범으로 몰려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마27:38, 막15:27, 눅24:33, 요19:18). 대낮에 벌거벗기운 채로 달리사 온갖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 동안 계시면서 일곱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 삼시(오전 9시)부터(막15:25) 제 육시(정오 12시)까지 세 말씀을 하셨고(눅23:34, 43, 요19:26), 제 육시로부터 제 구시(오후3시)까지 흑암이 세 시간 계속되는 속에서(마27:45, 막15:33, 눅23:44) 운명 직전 “제 구시 즈음에(오후 3시)” 네 말씀을 하셨습니다(마27:45-46, 요19:28, 30, 눅23:46).
주님의 십자가상의 여섯 시간은 그의 일생의 압축이었고, 구속 역사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3년 동안 십자가의 상의 여섯 시간을 위해 사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여섯 시간,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사 완성과 사단의 심판과 성도의 최후 승리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골2:23-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여섯 시간 동안 계시면서 남기신 불멸의 일곱 말씀, 그 가운데 첫 번째 말씀이 바로 ‘속죄’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 ‘이에’(그러나 오히려, 그렇지만)라고 하신 말씀에는, 어떤 이유도 불문하고 죄 사함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아가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골고다의 언덕에서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그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평소 가르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마태복음 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18:22)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주님은, 그 말씀 그대로 용서의 기도를 올리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여섯 번째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라는 말씀입니다(요19:30). 이 단어는 ‘텔레오‘의 완료형입니다. 이것은 그 끝이 부족하거나 불완전한 끝이 아니며, 애초에 계획하고 추진하였던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이룬 사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사역은 십자가 상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으며, 그 구속 사역의 효과는 영원히 계속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확인한 로마 병사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으며, 피와 물이 다 쏫아져 나왔습니다(요19:34).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하여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모두 완성하셨습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화목과 성도의 자세
(1)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화목
‘화목’은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적대 관계에서 우호와 평화의 관계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 하나님과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며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창1:26, 28, 2:15).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하나님과의 우호 관계는 단절되고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적대 관계가 되어 하나님의 원수들이 되었습니다(롬5:10). 사람은 범죄함으로 전적 타락, 전적 부패, 전적 영적인 무능을 가져왔습니다(욥15:16, 시14:1-3, 51:5, 53:1, 사44:20, 렘17:9). 이 진리는 칼빈주의에서 역설하는,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 본연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생은 육체의 부패성, 죄의 성질, 옛 사람이 있으므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를 우호 관계로 전환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능력조차도 없게 된 것입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에서 우호 관계로 회복되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요14:6).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향한 자비와 긍휼과 아가페의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요3:16),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롬3:25). 고린도후서 5:18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목’(和睦, Reconciliation)이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카파르’, 신약에서는 헬라어 ‘카탈라게’로 쓰였는데, 모두 ‘화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롬5:11, 11:15, 고후5:18-19).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멀리 떨어지게 하였으나, 십자가는 인간을 하나님 품속에 안기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습니다(고후5:18, 골1:20-22).
로마서 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 사 만물 곧 땅에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려주신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일생 동안 사망에 매어 종노릇하던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요3:16, 요일2:25).
속죄 사역은 십자가에서 단번에(once for all) 이루어졌고(히7:27, 9:12, 26, 10:2, 10, 롬6:10, 벧전3:18), 한 번으로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습니다(히10:14).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필요가 없으며(히10:18),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히7:25).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이외에 다른 속죄 수단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4:12).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역사상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엡1:4)을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그 값을 따질 수 없습니다. 시편 49:8 표준새번역에서는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여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구속이란 아무리 큰 재물이 있어도 능히 이루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2) 속죄받은 성도의 자세
참으로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영원히 갚을 길 없는 구속의 사랑에 빚을 진 자들입니다(롬1:14). 그런데 우리가 이 속죄 은총을 잊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그가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찔리고 채찍에 온몸이 상하면서까지 구원을 주셨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고전2:2).
십자가로 말미암은 속죄는 결코 일회용 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아무런 감격이나 감화 없이, 목에 걸고 다니는 액세서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의 근본이요,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생명 다할 때까지 목숨을 바쳐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요(갈2:20), 더 나아가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갈5:24). 자신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은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고(시119:104),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히12:4).
십자가를 자랑하는 길은, 사망의 그늘 아래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십자가의 생명,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온몸을 다 바치고 힘 다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행4:20). 우리가 이 속죄 은총의 빚을 갚지 않을 때에는 우리에게 화가 미치게 될 것입니다(고전9:16). 천국에 입성하는 그날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힘쓰는 하나님의 친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딤후4:2, 딛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