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 말씀은(마태복음 27:1-10) 밤새도록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안합니다.
공식적으로 의결는 했으나 종교재판에서 결정했다하여 예수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 자치권이 있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중대한 일, 사형을 위해서는 로마의 승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실제 군사권력이 로마 총독에게 있기에 총독이 결정을 해야 사형집행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한 절차가 하나하나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의 핵심적인 사건,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가룟 유다가 그의 행동을 후회하고 고통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 이야기는 짧은 부분이나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만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1.가룟 유다의 죽음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한 죄의 결과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죄값의 결과입니다.
->(34절) 종교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예수님을 보고 가룟 유다는 자신이 한 일을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가룟 유다의 입장에서는 그저 예수님이 자신과 노선이 다르므로 더이상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없으니 떠나기로 마음먹고 밀고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날 것인데 지금까지 고생한 대가를 은 삼십으로 받아야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죄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죄 없으신 분이니 재판을 받게 되어도 금방 벗어날 것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한 고급정보를 판 것일 뿐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분이 종교재판에서 사형으로 결정되고 집행을 위해 로마 총독에게 넘어가는 단계가 된 것입니다.
->이런 형국을 보고 있는 가룟 유다의 입장에서 자신이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게 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고통하게 된 것입니다.
->(6절) 뒤늦게 후회하고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서 은 삼십을 돌려주며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항변해 보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네가 당하라, 네 책임이다'의 반응만 받게 됩니다.
->유다는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일의 결과를 두고 스스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 삼십의 무게가 진짜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죽이고 받은 값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입니다.
->(5절) 무죄한 사람을 밀고해서 무죄한 죽음에 이르게 한 죄도 크고 깊다할 것인데 유다는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무게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저울추를 각자에게 두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을 따라서 행동하고 말합니다.
->물론 양심에 반하는 행동과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
->누구나 양심이 있어서 진실을 알고 있다면 양심을 거슬러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 가룟 유다가 그 양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행동과 죄의 책임을 생각하면서 어찌할바를 모르며, 고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은 삼십이 가치있는 것이 아닌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한 냄새나는 돈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양심의 눈으로 볼때 견딜 수 없고 더이상 움켜질 수 없는 고통의 증표가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더이상 그 돈을 가지고 있을 수 없으므로 성소에(성전) 던진 후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기준이 있음에도 때로는 욕망에 눈이 멀어 그 양심을 멀리 두었다가 죄의 책임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 양심이 불현듯 내 앞에 벽처럼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게 됩니다.
->우리는 죄의 법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만으로 의롭게 살겠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도 주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은 무죄한 피를 흘린 양심의 가책, 죄의 결과로 빚어진 비극입니다.
2.가룟 유다의 죽음은 교만함의 결과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떠나려고 결정하면서 성전지도자들에게 정보를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위치, 신원을 알려주고 예수님 체포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양심의 가책에 못이겨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의 근저, 뿌리에는 교만함이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한 혁명정부가 아니었기에 밀고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죽이기위함이 아니라 신변의 위협을 주어 자신이 원하는 길로 밀어넣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능력있으신 분임을 알기에 신변의 위협이 있게 되면 능력을 발휘하여 유형국가, 혁명정부를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같지만 결국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조정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교만이며, 어리석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도 교만입니다.
->극단적인 죽음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사람들 중 자기의 억울함, 답답함을 호소하려는 목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한 것이 과연 떳떳하고 맞는 일일까요?
->분명한 사실은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 교만인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다는 것도 교만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양심적이고 멋진 것같지만 교만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 한사람을 넘겼고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가 사울이라 불리우던 시절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잡아넘기고 스데반 집사의 죽음, 순교를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후 그리스도인 여럿을 잡아 종교재판, 공회에 넘긴 사울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자기의 관점이 붕괴되고 영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이후 전도자, 선교사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사울은 똑같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으나 가룟 유다는 자실하여 나그네의 피밭, 묘지만 남겼고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되어 로마제국 곳곳에 교회를 남겼습니다.
->이 엄청난 차이는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앞세우는 것이 교만입니다.
->내가 잘하는 것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며, 보기싫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앞세우는 것, 내 생각이 옳다, 내 뜻대로 하겠다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을 무너뜨려서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의 교만함을 무너뜨리고 주님 앞에 갔다면 베드로, 요한같은 사도가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 부인했으나 닭이 울자 회개하며, 통곡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오늘도 내 뜻과 계획, 생각과 옳다하는 기준을 꺽고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교만함도 연약함입니다.
->나의 의, 생각, 뜻, 계획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조차도 무너뜨려야 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오늘 하나님의 뜻 앞에 나의 뜻을 굽히고 엎드려 자복하는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