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 말씀은(마태복음 22:15~22) 세금 논쟁에 대한 단락으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 나타나셔서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표적을 행하시니 당시 성전지도자,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이 큰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고 싶으나 민심의 향방이 부담스러워서 조취를 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러한 배경과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말씀의 흐름과 지금부터의 흐름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나타나시어 자신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시므로 성전지도자들이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일을 하느냐'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저의를 아시고 '요한의 권위는 어디서 온 것이냐' 반문하시며,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표적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하늘로부터 온 표적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다'고 여러번 밝히셨습니다.
그때로부터 21장 끝부분부터 비유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왕노릇하고 있던 성전지도자들,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심판 메세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고 반대편에서 대응하기위해 종교지도자들이 조를 만들어 예수님을 차례로 찾아와서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논쟁의 첫 번째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세금 논쟁입니다.
두 번째 논쟁은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부활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세 번째 논쟁은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계명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15절) 이들의 논쟁 목적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올무, 덫, 곤경에 처해서 넘어뜨릴 수 있을까 입니다.
당시 신학적으로 가장 뜨거운 난제, 주제들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예수님의 명성에 금이가고 무너뜨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성경에 들장하는 대제사장,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지도자, 성전을 관장하는 자들입니다.
서기관은 율법학자이며, 전문적으로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성전의 일원으로서 생활비 지원을 받는 시람들입니다.
백성의 장로들은 요즘으로 바꾸면 국회의원이며,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입니다.
사두개인은 성전그룹 주변에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을 신학적으로 기득권을 떠받쳐 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두개파)
바리새인은 이에 반하여 부패한 것을 떠나 제하, 들판에 나가서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정확하게 지키며, 의를 나타내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회적 기득권이 없으므로 민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사람들의 마음이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께로 쏠리게 되므로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니고데모를 자신들 편인지 알기위해 보냈으나 예수님 자신을 성전의 주인,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자 자신들 편이 아님을 알고 예수님을 죽여야 겠다 결단하게 됩니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성전중심의 사람들과(대제사장,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 사두개파) 기득권 없이 율법을 고수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기대어 있던 바리새파 두 부류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일에 마음을 합하고 함께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첫 번째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 찾아온 사람들이 바리새인 들입니다.
오늘 세금 논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깨닫기 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첫 번째 주제는 가이사에게 세금바치는 것입니다.
->(16, 17절) 바리새인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영혼없는 말,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 할 때처럼 말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당시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 당원들은 유대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왕의 일파이며, 사회적 안정을 꾀하던 귀족들입니다.
->헤롯왕은 로마의 개가 되어 유대인들을 집어삼킨 비열한 왕이라 느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 강한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공동정신을 펼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가이사는 당시 로마의 황제를(시저) 말합니다.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의 질문이 민감한 이유는 유대민족의 자존심을 생각할 때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안되는 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니 성전에 낼 뿐 이방인인 로마사람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로마 사람들에게 세금을 낼바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광야, 제하에 나가서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지않으면 로마 군대가 들어와서 심판이 있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가이사, 로마의 황제가 권력자,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금을 내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던 바리새인과 세금을 내야한다고 생각하는 헤롯 당원들이 함께 찾아와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 함입니다.
->(18절)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겉과 속이 다른 너희들아, 왜 나를 유혹하느냐, 넘어뜨리려 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19, 20절) 로마의 기본동전 데나리온을 가져오게 하시며, 동전에 있는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묻습니다.
->(21절)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다 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합니다.
->(22절)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놀랍게 여기며 떠나갑니다.
->즉, 너희들이 얻은 물질, 경제권을 로마 황제의 것이라고 고백한다면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나님께 바쳐라 말씀합니다.
->로마정부에 '내느냐, 내지 않느냐'의 올무가 될 질문을 던지지 말고 너희의 고백이 무엇이냐' 묻고 계십니다.
->고백이 중요합니다.
->고백은 겸하여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백의 차원으로 본다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올무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땅한 고백을 드리는 우리 되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가 아니라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왔던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온전히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와서 할 수없게 될 때 어쩔 수 없다 생각하지만 온전히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고백하기 위해 여러방법을 만들어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첫 시간을 주님께 나아와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고 귀합니다.
->십일조와 주일헌금을 드리는 것 등등 모두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고백이 있다면 액수는 상관없습니다.
*오늘 이아침 주님을 온전히 왕으로 고백하며, 나아가는 우리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백을 귀히 여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