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 언약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the fulfiller of the new covenant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그 후에 노아와의 언약(창6:18, 9:8-17), 아브라함과의 언약(창12:1-3, 6-7, 13:14-18, 15:12-21, 17:9-14, 18:10, 22:15-18)으로 확대되었으며, 시내산 언약(출24:1-8, 신29:1), 다윗 언약(삼하7:11-16, 대상17:10-14)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례미아 선지자를 통해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고(렘31:31-34),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화평의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겔34:25-31, 37:26-28).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담 이후 10대 째에 노아를 택하시고, 다시 10대 만에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이 큰 민족을 이루자,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고 율법 책과 온 백성에게 피를 뿌리며 첫 언약을 세워 주셨습니다(출24:1-8, 히9:19-20).
그렇다면 이 율법(첫 언약,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1) 구약 ‘율법 아래’의 특징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인생은 율법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23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law)은 히브리어로 ‘토라’, 헬라어로 ‘노모스’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자신과의 관계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롬7:12). 그런데 사람이 범죄하여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오히려 율법 아래 매인 바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아래”놓여 있는 인생의 비참한 상태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습니다.
(1) ‘죄 아래’의 상태입니다.
갈라디아서 3:23에서 “율법 아래”와 “갇혔느니라”라는 표현이, 갈라디아서 3:22에서는 “죄 아래”와 “가두었으니”라고 표현되어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오기 전의 상태를 “율법 아래”와 “죄 아래”에 갇힌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갇혔느니라”와 “가두었으니”는 둘 다 헬라어 ‘슁클레이오’이며, 완전히 포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모든 인생은 죄에 완전히 포위되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6:14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법 아래”의 상태는 죄가 주관하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관하지”라는 단어는 헬라어 ‘퀴리유오’로, ‘지배하다, 다스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완전히 죄에 갇혀서 죄의 지배를 받으며 거기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로 비참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해방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갈4:4-5).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죄에서 해방해 주었습니다(마26:28, 엡1:7, 히9:12).
(2)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의 상태입니다.
갈라디아서 4:4의 “율법 아래”의 상태를 갈라디아서 4:2에서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의 “후견인”은 헬라어 ‘에피트로포스’로, 어린 상속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잘 성장하도록 양육과 보호를 담당했던 자를 의미합니다. 이 후견인을 갈라디아서 3:24에서는 몽학선생(夢學先生)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몽학선생은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로, ‘가정교사’를 뜻합니다. 또 청지기는 헬라어‘오이코노모스’로, 어린 상속자가 장성할 때까지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자입니다. 어린 상속자는 후견인과 청지기 밑에서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종과 같은 신세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 어렸을 때는, ‘후견인과 청지기’ 같은 ‘율법’아래서 종 노릇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상속자이면서도 그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율법에 매여 살던 자들을 마침내 해방해 주셨습니다.
(3)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의 상태입니다.
갈라디아 4:4의 “율법 아래”의 상태를 갈라디아서 4:3에서는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등학문”은 헬라어 ‘스토이케이온’으로, ‘기본 원리, 첫째 원리’라는 뜻입니다. 고대 헬라 자연 철학에서는 ‘만물을 구성하는 첫 번째 요소’를 뜻하였으며, 후에는 ‘초보적이고 일차적인 가르침’이나 ‘기술이나 학문의 기본 요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초등학문”이라는 개념 속에는 이것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온전한 수준이 있음을 암시하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17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초등학문의 완성자이십니다.
갈라디아서 4:3에서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종 노릇”은 헬라어 ‘둘로오’의 분사완료수동태 ‘데둘로메노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 노릇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가 이제는 끝이 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이 지긋지긋한 종노릇에서 해방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4-5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새 언약의 특징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이루시는 은혜의 언약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눅22:20, 고전11;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입니다(히9:15, 12:24).
그렇다면 새 언약은 옛 언약인 율법과 비교하여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1)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되는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8:8에서 “새 언약을 맺으리라”라고 말씀하고, 히브리서 8:10에 이스라엘 집과 세울 언약에 대해서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레미아 31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인데, 예레미야 31:31에서도 “새 언약을 맺으리라”라고 하시면서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렘31:33).
옛 언약이 돌 판에 율법을 새기는 것이었다면(고후3:7), 새 언약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함으로(고후3:3)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렘31:3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마4:23, 9:35, 22:16, 막4:33, 눅20:21) 백성의 마음에 말씀을 새기시고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2) 새 언약은 미리 정하신 언약입니다.
갈라디아서 3:17에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도록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전 1446년경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이래 그것을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그 율법보다 430년 먼저 생긴 것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때로부터 430년 거슬러 올라가면 주전 1876년인데, 이때는 야곱의 70가족이 애굽에 들어간 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주신 것은 주전 2082년, 창세기 15장의 횃불 언약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주전 1876년을 기준하여 “미리 정하신 언약”이 체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문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세겜 땅에 대한 모순되게 보이는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은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으나(창50:12-13), 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야곱이 요셉처럼 세겜에 장사된 것으로 설교하였습니다(행7:15-16). 야곱 자신은 애굽 땅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을 것을 확신하고, 세겜 땅을 미리 요셉에게 주었습니다(창48:22). 이처럼 세겜 땅에 묻힌 요셉(수24:32)의 배후에는 야곱의 믿음과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 집사는 마치 야곱이 세겜에 묻힌 것처럼 설교한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 집사는, 야곱이 세겜 성 앞에 장막 친 밭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100개를 주고 샀던 그 땅을(창33:18-20) 아브라함이 하몰의 자손에게서 샀다고 설교했습니다(행7:14-16). 야곱은 아브라함과 한 장막에서 15년간 함께 살았고(히11:9),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언약 신앙을 고스란히 전수(傳受)한 인물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창12:5-7)을 확신하고 그 땅을 구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겜 땅의 실제 구매자는 야곱이 맞지만, 언약적 관점에서 근원적인 구매자는 세겜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최초로 받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을 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므로, 스데반 집사는 ‘아브라함’이 샀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3:17의 “430년”을 계산하는 시작점도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가족 70명이 1876년 애굽으로 들어가려 할 때, 하나님께서 브엘세바에서 야곱에게 나타나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 ,”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언약을 다시 확증해 주셨습니다(창46:1-7). 잠시 두려워한 야곱은 언약의 확신을 가지고,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는 최종 목적이 이방의 객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섬기는 나라를 징치하고 큰 재물을 가지고 큰 민족을 이루어 4대 만에 언약의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있음을(창15:14-16)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430년”(갈3:17)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야곱에게 재확인되며 실제로 성취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까지, 언약적 관점에서 계산된 기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보다 언약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7의 “미리 정하신”은 헬라어 ‘프로퀴로오’입니다. 이것은 ‘프로’와 ‘퀴로오’(실행하다, 결정하다, 확정하다)가 합성된 단어로, ‘앞서 실행하다, 앞서 확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율법보다 먼저 실행된 이 언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새 언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3) 새 언약은 영원하고 완전한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13에서 옛 언약을 “첫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으며, 옛 언약은 새 언약 안에서 완전하게 됩니다(마5:17). 새 언약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히9:15).
또한 옛 언약은 무흠(無欠)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8:7에서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무흠’은 헬라어 ‘아멤프포스’로 ‘흠잡을 것이 없는, 완전한’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이 결코 완전하지 못함을 나타내며, 완전한 새 언약이 필요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4) 새 언약은 완전한 ‘죄 사함’의 언약입니다.
구약 언약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죄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3:20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정죄를 통하여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죄를 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얻은 직분을 “의문(儀文)의 직분”(고후3:7)이요, “정죄의 직분”(고후3: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행31:34). 히브리서 8:12에서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용서, 영원한 용서, 확실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이 새 언약을 성취하였습니다(눅22:20, 고전11:25).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사하고 모든 저주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이 죄 사함은 영원하고도 완전한 대속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속량하시고”는 헬라어 ‘엑사고라조’로 ‘노예 상태에서의 구출과 해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새 언약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출하시고 해방해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4:4-5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에게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새 언약의 성취자이심을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떡을 가져 사례하신 후에 잔을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고(눅22:20), 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28).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 나무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써 타락한 인간에 대한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엡1:7, 히9:12, 벧전1:18-19, 2:24). 그러므로 모든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