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5일 새벽말씀
사무엘하 21:15~22
한 사람에게 신앙이 형성된다는 것은 보는것이 달라진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여러분들께서도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신앙이 펼쳐졌을때 이전과는 다른 시야를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신앙의 폭이 넓어지며 내 상황만 보지 않고 상황을 둘러싸고 아우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고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두번째는 더 멀리보며 길어집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하죠. 성경에서의 종말은
믿는 자들에게 기다림의 대상이 됩니다. 신앙인은 역사의 종말을 소망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안에서 죽음이 사라지는 그 세계를 보며
사는 존재가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가까운 곳을 세세하게 보게됩니다. 이미 내게 주신 은혜를
몰랐으나 코 끝에 닿는 공기, 쉬지않고 뛰어주는 심장에 대한 감사를 느끼며 보게됩니다.
이처럼 신앙은 보는 것이 달라지는 사건입니다. 내가 하는 일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셨고 행하고 계시며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게되는 사건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신앙으로 살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매일성경 오늘본문에 '다윗의 용사들' 이라고 제목이 붙여졌는데요. 네명의 다윗의 부하들이 등장합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 후사 사람 십브개,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 삼마의 아들 요나단.
이 네 명의 용사가 각각 상대한 적이 누구였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들은 저마다 가드의 거인 장수들을 상대했습니다. 본문 22절의 말씀을 보시면
가드의 거인족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의 부하들의 손에 다 넘어졌더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성경은 정작 거인족을 상대한 다윗의 부하들을 '용사' 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그의 '부하들' 이라고만 하지요.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것은 다윗의 부하들이 강력했고 좋은 무기와 좋은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가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가드의 거인족속은
진짜 크고 강했으나 그들을 다윗의 사람들이 모두 무찔렀다는 것입니다.
본문 어디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16절에 거인족의 아들 중에 무게가 삼백세겔 되는 놋창을 들고 라고 하지요. 삼백세겔의 놋창.
19절에도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므리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가 배틀채 같았더라
20절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여섯개씩 모두 스물네개가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본문은 저마다 그들이 얼마나 크고 강했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하나같이 거인 장수들의 강력함을 강조하고 있지요.
다윗의 부하들이 강했다. 그래서 거인족속을 물리쳤으니 우리도 강해져야한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메세지가 아닙니다.
다윗 부하들은 참 평범했다 .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거인 족속을 무찔렀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와 강하심,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인간의 존재, 인간의 행위를 강조했던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이것이 바로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입니다.
항상 성경 본문을 볼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시는가를 보면서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사람의 대단함을 보지말고 어떻게 하나님은 저 평범한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행하셨을까
'하나님 참 대단하시다'
이것이 우리가 내리는 최종 결론이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무엘상 17장의 재현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지요.
다윗이 이긴것은 그가 강력하고 물매 실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쓸모있는 물매였더라도 거구 장수를 상대하는 자리,
만약 다윗이 실패한다면 이스라엘이 전멸하게 되는 자리. 그런 싸움이었습니다.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걸린 상황속에서 물매를 들고 나간다는 것은 참...어울리지 않으며 부끄러운 무기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작고 보잘것없는 무기가
결국 전문 싸움꾼을 쓰러뜨렸습니다.
누가 그 배후에서 역사하셨습니까?
누가 이 상황을 연출하고 감독 하셨습니까?
하나님 입니다.
다윗의 실력이 참 좋았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모든것을 좌지우지하고 계신겁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상 17장의 재현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작용하고있지요. 방점은 다윗의 부하들이 아니라 '하나님' 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진정한 용사는 그의 부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이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모든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내일 살펴볼 본문인데요. 내일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반석되심.
여호와가 나의 반석이십니다 라고 하는
그 긴 고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겼다. 또는 우리가 졌다 라고 해서 우리의 강함, 약함에 집중하는 것.
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항상 '상수'죠. 우리는 변수입니다.
잘나갈 수도 못 나갈 수도, 가난할 수도 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강하시고 언제나 부하시고 언제나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으며 시편의 고백과 같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 항상 일정하여 시대를 쫒아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근거 삼아 살기때문이며 하나님이 나의 용사이십니다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우리의 강함이나 약함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십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에 잇대어 살아가는 삶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42장 13절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여호와가 용사같이 나가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용사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