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
사무엘하 19:16~39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긴 시간
도망자의 신세였던 다윗은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다시 왕의 자리를 회복하게됩니다.
다윗의 삶은 참 굴곡이 많지요.
다윗뿐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도 그럴것입니다.
유리표면처럼 매끄러운 삶이 없지요.
오를때가있고 내려갈때가있고
웃을때가 있고 눈물흘릴때가 있고 그럴때가 있습니다.
낮아지고 눈물을 흘리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낮은 자들의 마음, 눈물흘리는 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됩니다.
만약 우리 삶이 유리표면처럼 일정하다면
아픈사람, 낮은 사람들의 그 고민과 쓰라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살면서 바닥을 치는 경험을 통해 마음이 넓어지고 풍성한 이해를 할 수있습니다.
누가 아픈사람의 마음을 가장잘 알까요?
누가 실패한 사람의 마음을 알까요?
아파 본 사람, 실패해 본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기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시면 어렵게 빠뜻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은 금액을 기부하는 것을 자주 볼 수있습니다.
배고픔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배고픈 자들의 마음을 잘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은 곳에만 있는 사람에게 긍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외국의 어느 교단에서는
목회자를 선발할때 성경지식, 경험뿐아니라
그 사람의 고난의 경험, 실패이 경험을 반드시
확인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의 실패와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만약 굴곡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시키며
나의 삶을 확장시키는 구나' 그렇게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돌아오는 길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므이입니다.
몇일전 본문에서 이 시므이는 괘씸한 사람이었죠.
왕이 도망할때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리며
다윗을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아비새는 왕을 신랄하게 비난했던 시므이를 보며 '죽은 개'라고 칭하면서 죽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의 생각에 왕을 저주하는 자를 살려두는것이
정의롭지 않다고 여겼을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저주를 모두 받아냅니다.
그의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입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이처럼 거침없이 저주했던 시므이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전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제는 베냐민 사람 천명을 데리고 나와
왕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19절 말씀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데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아비새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시므이를
또 죽이자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전과 같이
시므이를 죽이지 않고 용서해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용서의 말씀입니다.
용서란 무엇입니까?
과거를 깨끗하게 잊어주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 기억하고 헤아리는 사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19절 말씀에 '종의 패역한 말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용서는 기억의 문제입니다.
기억하지 않을 때에야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과감하게 과거를 망각해주는 것,
'과거가 아니라 이제 미래를 봐줄게'
미래를 소망하는 것, 그것이 용서입니다.
사람들의 과거 행위를 수첩에 기록하여 두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장부를 꺼내드는 사람은 결코 용서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장부를 서랍속에 넣어두는 사람,
그것을 불태워 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상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용서의 본질, 핵심을 보게 되는데요.
탕자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지난날의 행위를 기억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얼마를 가져갔는지 그 돈을 어디에다 썼는지
묻지 않으며 함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 아들의 존재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용서가 가능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누군가를
오른편 뺨을 때린 자를 ,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은 자를 용서 할 수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용서받은 자이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견고한 용서를 우리가 받은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만을 행할 수 있지요.
왜 어린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수도 없이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들은 말을 할 수있고 받아본 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안겨본 사람이 누군가를 안아 줄 수 있고
따뜻한 말을 들어본 사람이
상대를 정중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받아본 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용서도 그렇습니다.
용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산출해낼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흘려보낼 뿐이며
경험한 것을 행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용서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 누가 기도하기위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모두는 시므이보다 더 악랄한 반역자이며
이미 하나님께 더 큰 반역을 저지른 자 들입니다.
하나님을 내쫒고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겠습니다' 라고 했던 자들입니다.
그런시도를 우리는 지금도 범하고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단번에 용서하셨습니다.
여러분 북한에서는 반역한 자는 바로 총살아닙니까?
총살당하고 불태워 죽임 당하고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반역한 우리를
은혜로 살려 주십니다. 용서해주신 결과죠.
하나님은 우리의 지난날을 기억하지 않는다는겁니다.
그럼 무엇을 보실까요?
우리의 행위를 보지않고 하나님은 십자가를 보십니다.
우리를 십자가 라고 하는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전지하신 분,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는
그 전지 하신 분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과거 행위를 기억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용서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용서를 헤아려보십시요.
그래서 우리는 용서할 수있습니다.
남들의 허물이 자꾸만 보입니까?
다른 이들의 행동이, 부모, 자녀, 배우자의 행동, 이웃,교우 들의 행동이 잊혀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십시요.
그 받은 사랑을.. 그 받은 용서를..
베드로가 예수님께 ' 우리가 남들을 몇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번쯤 하면 되겠습니까' 했을 때에
예수님이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 번 .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이지요.
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자 이야기를 보십시요.
그가 만 달란트 탕감을 받고 돌아가는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 진자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 달란트
그 이상으로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자꾸만 남의 허물이 보이고 용서가 안된다면
그래서 속으로 분노가 차오를 때에
내가받은 용서, 그 사랑을 기억해 내십시요.
그러면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이 삶에 반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집사님, 귀한 말씀을 글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삶 속에서 용서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다 빛처럼 다가온 말씀이 있어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일부분을 인용합니다.
'미하슬라프볼프'라는 신학자는 '결국은 용서해야 된다'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됩니다.
그는 크로아티아 내전으로 인해 동족에 의해 가족이 살해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강연을 듣던 유명한 신학자가 "그래서 당신은 용서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침묵하던 미하슬라프는 거듭된 질문에 "못했습니다." 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면 강연을 왜 그렇게 하는가?"라고 묻자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된 질문에 "그리로 나아가야지요"라고 합니다.
거기에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가 용서 못하는 것, 우리의 실력상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못하는 것~ 무슨 보상을 받는가? 어떤 효과가 있는가? 그걸 겪으셔야 됩니다.
보복으로는 아무런 답이 없다는 것을, 살면 배웁니다.
누구를 욕하는 것은 아무런 영혼의 유익이 없다는 것을, 인생을 통해서 실컷 배웁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용서는 우리 영혼의 답이 되고 우리 인격과 인생을 감사케 합니다.
성경의 요구는 다만 '강요'가 아니라 다만 '윤리'와 '가치'가 아니라 그 실재하는 '진리'이기 때문이
성경이 권하면, 요구하면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 복된 인생을 사시는 여러분들께서 의심 많고 고함소리만 높은 이 시대에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옆에 있어 주고 숨을 쉴 것 같은 사람으로 여러분의 자리를 지켜내시고 이 시대를 구원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