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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기지교회

3/12 대구기지교회 새벽기도회

선우건2025.03.12 05:5303.12조회 수 8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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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기지교회 3/12 (수) 새벽기도회

https://youtube.com/live/50jDHK8yW4I?feature=share

선우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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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민 25.03.12 06:54 댓글 수정 삭제

    샬롬~! 매일성경 (누가복음 10장 25절- 42절)
    3월 12일 새벽예배말씀입니다. 

    29절, 어떤 율법교사가 자신이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율법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율법에 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행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이 누구인가 정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래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이웃을 정하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같은 유대민족이었습니다. 로마사람이나 이방인들은 원수이기때문에 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않았고 사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마 이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이 누구인지 예수님께 물어본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이웃의 범위가 각각 다른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웃에 대한 범위가 넓었던 사람인 것같습니다. 가령 어떤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이라도 죄인 혹은 세리, 창기들 같은 경우에도 이웃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웃의 경계가 상당히 중요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율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누가 이웃이라고 생각하시냐고 질문하십니다. 자기를 옳게 여겼던 그 유대인은 차마 '사마리아인(이방인)'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돌려 표현합니다. 그것은 이 사람도 다른 유대인보다 이웃을 넓게 설정했지만 차마 이방인(사마리아인)까지도 이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같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한계를 경험한것같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다는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의로움도 제한적이고 편협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사라리안 사람처럼 이웃을 도와야한다는 말씀인 동시에 우리의 편협함과 우리의 의에 한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자랑했던 그 율법교사는 오히려 자신의 의가 얼마나 초라한지 깨닫게 됩니다. 나의 의의 연약함, 선함의 부족함, 한계를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드러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이어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었던 여인입니다. 마리아가 그냥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 관용적으로 계속 등장하는 이 표현은  '그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절)입니다.
    주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듣는다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여러번 등장합니다. 가버나움에서 귀신 들린 자가 귀신이 나간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며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편 마르다는 열심히 영접하는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봉사나 헌신은 무의미하고 말씀듣는 것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의 맥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선을 쌓았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굉장한 덕목이요, 선입니다. 마르다는 선을 열심히 행했습니다만, 마르다는 영생에 있어서 자신의 의와 노력과 선으로 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인정하고 제자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유한하고 연약한 죄인이 영생을 이르는 길임을 알게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교사의 영생에 대한 질문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건으로 진정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나의 노력, 선을 행하는 능력,  나의 선함과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의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의 길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아마 율법교사는 자기의 깨달음, 자기의 의에 굉장히 만족했던 것같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빨리 뽐내고 싶어서 안달난 어린아이같은 심정이었던 것같습니다. 자신은 율법이 최종적으로 추구했던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학자들이 율법의 전통에 휩싸여 본질을 추구하지 못할때, 이 율법학자는 정확하게 율법의 본질을 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옳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학자는 자신이 옳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을 쌓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의에 한계가 있는 사람임을 깨닫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고 옳은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옳은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 율법학자도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너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을때 이 사람은 차마 사마리안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지않았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머리 속에 무엇이 옳은것인지 의로운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천할 능력은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오늘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경험할때 제자들같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능력과 힘, 지혜와 지식, 사상과 철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의 연장선인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서 성령받기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하고 또 오늘 하루 속에서 남에게 어떻게 친절하게 대해야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친절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도 나의 인격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지만 나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율법학자의 삶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내가 정해놓은 경계선 안에서만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말씀을 지키고 어려운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나의 깨달음과 의와 노력, 마르다의 열정에서 오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성령이 주시는 능력안에서 온전히 예수님을 의지한 마리아처럼 주님을 의지할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오늘 아침에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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