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기지교회 2/28 (금)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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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 2월 10일 새벽예배말씀입니다. | 박현민 | 2025.02.10 | 3 |
샬롬~! 매일성경 (누가복음 7장 18절- 35절)
2월 28일 새벽예배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믿을 수 없어." 와 "믿지않을거야." 두가지의 반응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전자는 의심이고 후자는 불신앙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의심하였고 바리새인은 불신앙을 보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삶을 놓고 보면,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사람을 두려워하지않았고 자신의 말에 따른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거침없이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메시지는 강력했습니다.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회개하였고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헤롯왕이 죽은 그의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자 주저하지않고 비판하였고 옥에 갇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은 그의 굳건한 태도와 달리 의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메시야가 올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고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설교했고 심판을 피하기위해 회개를 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마음과 달리 예수님은 심판보다는 치유와 회복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모습에 오히려 요한은 혼란스럽고 의심하였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악인을 벌하고 심판하며 압제로 벗어나게 할 메시야의 모습과 다른 예수님의 모습에 그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사야가 말씀하셨던 약속의 말씀인 메시야를 통한 회복으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알리셨습니다. 2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자라도 그보다 큼이라." 처럼 요한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류 중 가장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 중에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준비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선지자들도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요한보다 크진 못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이기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큰자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늘에서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지극히 작은자입니다. 예수님을 의심해서일까요? 그렇지않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요한의 사명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데까지 보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보지 못했습니다. 완성된 메시아의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들이 지금 보기에는 믿음도 없고 연약해보이지만 그들은 주님의 모든 사역을 본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장면들을 본 사람들입니다. 이 크고 작음의 의미는 예수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른 복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로마를 멸망시키고 악인을 심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악인이 아닌, 의인이신 유일하게 죄가없으신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임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요한의 바람처럼 악인을 심판하셨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지배했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눈에 보이지않는 본질인 죄를 끊어내기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그 증거가 부활입니다.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복된 일이고 중요한 사역인 것입니다.
29절부터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요한도 거부했고 예수님도 거부했습니다. '믿을 수 없어.'는 의심이지만 '믿지않을거야.'는 불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는 '믿지않을거야.'였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믿지않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엔 그러기로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나기에 그 누구의 조언도 받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우월감과 자만심은 불신앙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힘과 종교적인 생활을 본인들의 근간으로 두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을 의심했지만 주님은 세례요한을 비판하지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보다 큰자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을 수 없어'와 '믿지않아'는 근본부터 다릅니다. 믿지않아는 내 안의 뿌리가 하나님이 아니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믿을 수 없어는 내 안의 뿌리는 하나님이 맞습니다만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과 내가 당면한 이 상황이 하나님께서 주실리가 없는데에서 오는 반응입니다. "믿을 수 없어.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있는거지?"하는 의심이 순간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의심의 순간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과 더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럴때는 다시 한번 요한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처럼 예수님께 다시 한번 물어봐야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우리는 들어야합니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면 이러실거야, 예수님이라면 이러실거야."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정말 주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분이라고 말씀해주시는 순간이 우리가 의심할때입니다. 의심이 들어도 괜찮습니다. 의심하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책망하시지않으시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올바르게 교정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보다 성품도 신앙생활도 훌륭하지않고 경건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주님을 아는 것이 복됨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것은 주님의 사역을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의심의 순간이 들때 다시 한번 주님앞에 나아갑시다. 내가 생각했던 주님이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 주님 말씀에 집중하여 시선을 교정하는 대구기지교회 성도님들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