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기지교회 2/25 (화)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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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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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 3/12 대구기지교회 새벽기도회1 | 선우건 | 2025.03.12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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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 2/15 대구기지교회 새벽기도회 | 선우건 | 2025.02.15 | 4 |
422 | 2월 10일 새벽예배말씀입니다. | 박현민 | 2025.02.10 | 3 |
샬롬~! 매일성경 (누가복음 6장 27절-38절)
2월 25일 새벽예배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며 본질에서 벗어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며 왜 저럴까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상식적일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요약하고 정확하게 목표를 짚으셔서 우리는 그 말씀들이 당연히 맞다고 생각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왜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다른것에 삶을 낭비하는지 안식일에 몇발자국을 걷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러한 전통에 왜 목메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처럼 예수님 역시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주신 계명이 어제 나누었던 네가지 복과, 네가지 저주이면서 동시에 오늘 말씀하시는 타인에 대한 자비로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계명보다 기독교전통, 신앙의 전통을 더 붙잡고 중요하게 여길 때가 더 많습니다. 헌금생활, 주일성수 같은 종교생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하고 좋은 것들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계명이 아니고 전통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는 신앙적 행위들은 우리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역사의 함축을 통해 만들어낸 전통이므로 굉장히 유익합니다. 그래서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의 신앙에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종적으로 신앙을 통해서 지켜야 할 계명은 바로 타인에게 자비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할 최종적인 계명이며 이것을 지키지않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원수를 사랑하라."에서 원수가 방점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중 계속 지칭하는 같은 부류들은 자신을 향하여 공격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 "너희의 뺨을 치는자", " 겉옷과 속옷을 강제적으로 빼앗는자"를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공격하는 자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그당시 뺨을 치거나 겉옷이 아닌, 속옷까지 빼앗는 행위는 굉장히 모독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에 대해 폭력적으로 대항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폭력 대신 자비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누군가 나를 공격하고 저항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타인에 대한 자비움을 잃지않는것, 다시 말해,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시면서 요구하셨던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잘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독교의 유일한 계명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전통에 목메이는 것이 아닌,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 빠졌었던 오류에 빠지지않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막 대하지 않고 자비롭게 대하며 존종하는 것, 내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예수님의 계명을 행하는 일이요, 진정한 신앙을 행하는 본질이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종교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를 잘 드리고, 새벽예배를 잘 드리고 봉사생활을 열심히 하는 모든 전통을 통해 최종적으로 도착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달라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이것은 하면좋고, 안해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이요, 목적이요, 유일한 계명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에 대한 무한한 자비로움과 존중함과 사랑하는 이 삶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나를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뺨을 돌려댄다는 것은 이기적인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다니지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에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가 가까이 사는 삶입니다.
나를 공격하고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조차도 관용하고 무례하지않고 존중하는 태도는 나의 본성으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십자가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백성을 향해 "하나님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밀접한 삶을 살때만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며 결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는 한 열매는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니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않습니다. 이 사건이 똑같이 인간사회에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스데반집사의 사건입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최후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작정 스데반처럼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가 예수그리스도의 온젆한 삶을 살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하여."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에 충만할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주신 계명인 타인을 지극히 자비롭게 대하며 존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삶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예수 닮는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인, 타인을 향한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고 평생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노력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