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 말씀은 (디모데후서 2:1‑13) '내 아들아' 제목으로 상고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간절함이 보다 깊게 느껴지는 서신서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이 생애 마지막을 앞두고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이기에 간절함이 깊게 느껴지기도 하고 더나아가 상황적인 이유보다는 복음적인 이유로 간절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성도됨을 풍성히 누리고 있었기에,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그의 삶에 확실하게 성취되었기에 전해지는 간절한 마음이라는 관점으로 바울의 서신서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9‑10)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혼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바울이 이 확신에 찬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으로써 드러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세상 가운데 영원히 살아있고 절대 썩어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선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디모데후서 2장 1절에서 디모데를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사랑하는 아들,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를 '내 아들'이라 칭하고 있는 것은 디모데가 바울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단순히 친밀함의 표현이기 보다는 더 없이 친밀함, 결코 분리될 수 없이 깊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상징하는 표현이며, 성경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들로 설명하는 경우에 전하고자 하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동질의 관계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어떤 대상을 사랑하려면 나와 같은 존재여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내 몸같이 여겨지는 대상이어야 죽기까지 그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이기에 디모데를 자기 몸같이 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도 동일한 마음으로 바울을 사랑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사랑을 이들이 복음 안에서 나누게 된 참된 사랑 안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내 아들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내 아들아'라고 부르고 난 후에 무슨 말을 할까요, 어떤 내용을 간절하게 전할까요?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자녀를 불러 앞에 앉혔다고 생각하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의 명예를 영원히 기려라, 내가 물려주는 유산을 더 많이 불려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으며 그런 부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딱 한마디 '행복하라'고 할 것입니다.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유일한 소망일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막연한 행복을 빌어줄 수 있겠지만 바울은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디모데에게 막연한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리고 있는 확실한 행복, 실제로 누리고 있기에 확실히 전할 수 있는 행복, 사실은 이미 디모데도 받아서 가지고 있는 그 행복을 더욱 온전하고 풍성하게 누리기를 축복하며 마지막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행복해라, 내가 누렸고 너도 이미 가지고 누리고 있는 그 행복을 더 풍성히 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모든 권면의 내용이 이와 같은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1:13‑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바울이 말할 때 '내게 들은 바 바른 말과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은 복음 안에서 얻은 행복,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행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지키라'는 말은 '누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그 행복을 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강하라'는 말을 다른 번역본들은 '굳세어지라'라 표현하고 있으며 이 말도 '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 즉 복음으로 말미암은 행복을 더 풍성히 누려가므로 굳세어져 가는 것입니다.
‑>복은을 누릴 때 그 경험이 쌓여서 굳세어져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이 말씀은 과업을 주고 사명을 맡기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행복을 너와 함께 나누었듯이 네가 누리는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그들과 함께 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바울의 말들을 이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내가 실제 누리고 있는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있는 행복을 아무리 강조하고 주장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런 함정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못 누리는 것을 누구에게 누리라고 하겠습니까?
‑>삶이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표정과 분위기에서 행복이 드러나야 합니다.
‑>잠시 잠깐 좋은 일, 기쁜 일이 있어서 우리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드러나는 행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그 행복을 보고 관심이 생기고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실제 누리고 있는 행복을 디모데와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성도들도 꼭 누리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이라는 시점에 자신이 실제 누리고 있는 행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강조하는 이유는 디모데후서 2장 3절 이하의 내용을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고 죽음도 불사하는 사명을 강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마지막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난'의 사전적 정의는 '괴로움과 어려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앞서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성경에 사전적 의미로 쓰이는 고난도 있지만 고난의 사전적 정의를 적용하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은 모순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다, 고난을 당하다 못해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죽는 자리까지 기꺼이 나아가신 이유가 우리도 그 고난을 당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주인 된 우리의 죄의 결과로 우리가 당했어야 할 고난, 즉 심판을 우리 대신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가 고난이라면 예수님은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디모데후서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공동번역성서를 보면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함께 받게 하려 함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주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있기에 다른 이들, 다른 지체들도 이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더 풍성히 누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지 않고, 이것을 누리지 않고 있다면 누군가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도 못할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도 이러한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은 나중에 죽어서 갈 천국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도'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들도, 너희도, 앞으로 예수를 믿는 은혜를 받을 자들도 자신과 같은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고난은 세상적 괴로움과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성도가 죄의 기준과 가치로만 가득한 세상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역행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행하는 삶이 가능한 이유는 그 삶이 행복해야 가능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복되고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4‑6) 병사로 복무하는 자의 예, 경기하는 자, 수고하는 농부의 예가 모두 행복하기에 갈 수 있는 길, 행복하기에 감당할 수 있는 수고, 행복하기 위해 기꺼이 살아낼 수 있는 원리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서 '사명, 고난감수, 죽음불사'의 이야기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깊이 묵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아 누리는 실제적이고 현재적인 것이 되기를, 오늘 하루의 삶이 그런 자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 안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는 것뿐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 선하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시고 또 의지하시고 신뢰하시는 귀한 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