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 말씀은 (사도행전9:1‑31) '여전히, 홀연히' 제목으로 상고하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은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주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사울이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잡으러 다니던 자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는 자로 변화된 과정은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비단 사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믿는 자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오신 것이 얼마나 극적인 은혜인지를 보여주는 두 단어는 '여전히와 홀연히' 입니다.
‑>(사도행전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은 예수님이 찾아오실 만한 어떤 준비나 행동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하던 일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울이 하던 일입니다.
‑>(사도행전8:3)'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더라'
‑>하나님이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진작 잔멸되고도 남았을 일을 사울이 여전히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은혜는 은혜 받을 만한 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은혜가 필요한 자,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가 바로 은혜받을 만한 자입니다.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는 은혜 받는 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는 자에게 달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셨기에 받은 것입니다.
‑>내가 남이 아직 받지 못한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셔서 먼저 받은 것이기에 나를 남과 구별하는 어떤 것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사울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채로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사도행전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은혜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단어가 '홀연히'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홀연히' 임하는 것입니다.
‑>'홀연히'의 의미는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는 대상이 전혀 뜻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예상하지 않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은혜를 주는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셔서 받았기에 은혜를 받는 대상으로서는 갑자기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은혜를 받는 대상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편에서 보면 갑자기 받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게 된 유일한 근거입니다.
‑>(에베소서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내가 받은 은혜를 굳이 설명하려면 죄인이어서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죄의 길을 걷고 있는 자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홀연히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울에게 어떻게 임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되 철저하게 사람을 위하여 주십니다.
‑>많은 간증에서 '하나님이 치셨다'는 말은 조심해야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치셨다'는 표현은 사울의 삶 가운데 임했던 은혜의 의미를 퇴색시키거나 변질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고 옳다고 여기는 일을 못하게 하시려고 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일하시는 원리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작정 주시거나 억지로 받게 하지 않으시며, 그렇게 일하신 적이 성경을 보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9:3‑9) 이 장면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마치 강압적으로 연행해 가는 모습을 떠올리시면 안 됩니다.
‑>강압적으로 사람을 결박하고 끌고 가버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사울이 하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위협과 살기가 아닌 은혜와 인자로 사울을 안전하게 이끄시고, 사울을 향한 주님의 뜻을 친절하게 알리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이 원치도 않는 길을 강제로 끌고 가시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무작정 맡겨서 감당하게 하시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원리로만 행한다면 실족할 자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로 인해서 작은 자 중 하나가 실족하거나 믿음이 약한 자가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9:3) 예수님은 먼저 하늘의 빛,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사울을 둘러 비추시므로 그의 걸음을 멈추십니다.
‑>사울의 걸음은 사람을 죽이러 가던 걸음입니다.
‑>(사도행전9:4‑5) 그리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한마디 말씀으로 사울로 하여금 죽기까지 박해를 당한 예수가 지금 살아서 영광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그 예수를 여전히 박해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자기 의로, 자기의 수고와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여긴 지난 세월이 죄인 된 자신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결국 하나님이 뜻하신 때에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를 무한히, 무조건적으로 베푸신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도행전9:6‑8)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라고 말씀하시며, 그 자리에서 함께 소리는 듣고 있지만 빛은 보지 않아서 눈은 멀쩡했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까지 안전하게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네가 행할 것'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사명을 떠올리나 뒤이어 사도행전 끝까지 나타나는 사울, 바울의 모습이 과연 사명을 감당하며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는 것으로 그려지는지를 확인해 볼 것입니다.
‑>(사도행전9: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시작부터 하나님이 금식 기도를 시키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청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유대교회 중심부에서 보낸 시간이 이십년은 족히 되었을 것인데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들려주신 복음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재해석하고 재조정하느라 먹을 것을 아무리 갖다 주어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입맛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사울에게는 복음, 그 충만한 빛이 자신에게 비추어 들어오는 상황입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았어도 오직 복음으로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재해석하고 재조정하는 은혜를 입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어쩌면 보지 못하는 채로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한 사흘간의 시간은 사울 안에 가득 차 있던 위협과 살기의 감정의 근간이 되었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비워지고 예수 부활의 진리만으로 가득히 채워지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금식 기도하며 억지로 사명 감당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지는 시간, 예수 부활의 진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지는 시간이었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너무나 인격적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이어서 나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을 박해하던 사울에게 당신의 뜻을 알릴 사람을 택하신다면 어떤 사람을 택하셔야 하겠습니까?
‑>적어도 예수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택하여 부르시는 사람이 '아나니아' 입니다.
‑>첫 시작은 좋습니다.
‑>(사도행전9:10) 주님이 환상 중에 아나니아를 부르시니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멋지게 대답합니다.
‑>(사도행전9:11) 그런데 문제는 아나니아에게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말씀하신 후에 그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어떻게 생각하고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9:13‑14)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고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을 늘어놓으며 결국은 못 가겠다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와중에도 말 안 듣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가 부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무작정 가라고 하시지 않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9: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이미 주님이 사울에게 역사하고 계심을 알려주시며 안심시켜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9: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방식이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울을 그동안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한 대가로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며 받는 고난을 죽을 때까지 자기 인생에 채워야 하는 그릇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 치시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위하여 사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도 누군가를 위하여 부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위하여 부르십니다.
‑>사울보다 이방인이 앞서지 않으며, 사울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며, 애지중지하십니다.
‑>(사도행전9:17‑18) 아나니아를 통하여 안수하시므로 사울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십니다.
‑>단순히 시력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의 존재가 새로워졌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의 안에 새롭게 부어주신 새 마음과 새 영, 주님의 마음과 원리가 누려지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은 음식을 먹고 몸이 강건해진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 진정 강건하며 날로 온전해져가는 성도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사울의 삶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이니 세상적 기준으로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기준, 복음의 기준,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성도의 새로운 마음과 원리로 행하여 복을 누리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복을 누리는 자리로 초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9:20,22,29) 사울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합니다/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합니다.
‑>사울이 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 그가 변화된 것이 그에게 확실하기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행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을 비롯한 모든 성도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은혜를 누리고 주를 경외하며 성령의 위로로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으로 함께 세워져 가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이 복을 누리는 현장으로서 묘사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이 복이 사울과 동일한 은혜를 받아 성도로 거듭난 우리의 삶 위에도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