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 말씀은 (사도행전5:17‑32) '가르치더니' 제목으로 상고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면 옥에 갇혀도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내주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의 일에 헌신하는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기도하고 찬송했더니 옥문이 열린 비슷한 예가 사도행전16장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의 본문을 가지고 우리도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하고 찬송하면 하나님이 문제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다고 해석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도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고난이 있을 때에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기도하고 찬송하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해석에는 두 가지의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 옥에 갇힌 것이 문제고 옥에서 풀려난 것이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옥에 갇혀보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기에 옥에서 풀려난 것은 간증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 해결의 관점으로 보면 애초에 문제가 없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정작 문제의 당사자인 사도들은 옥에 갇힌 것을 전혀 문제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을 몇 장만 뒤로 넘겨보면 이러한 해석을 적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습니다.
‑>사도행전16장 바울과 실라사건 이후 21장에서 바울은 결박당하여 연행되고 로마까지 호송 되어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이 잘려 순교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사도들이 처한 상황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사역의 관점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는 '가르치다'입니다.
‑>(사도행전5:21,25,28)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가르친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예수님과 대제사장 무리, 사도들과 유대교 관리들이 처음부터 갈등하고 충돌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셨을 때 잡으려고 달려들지 않았고, 치유와 이적을 행하셨을 때 죽이려고 덤벼들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과 유대교 관리들의 갈등의 기점, 충돌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까지는 갈등과 충돌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다른 언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장면에서 그들 중 누구도 그 후에 삼천이나 더한 신도들에게 다른 언어로 말하는 법을 훈련시키지 않고, 또 유대교 관리들도 그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는 장면에서 나머지 사도들 중에 누구도 베드로처럼 병 고치는 능력을 행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또 베드로도 다른 사도들이나 믿는 자들에게 전수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관리들도 병자를 고치지 못하게 하려고 차단하거나 병자를 고쳤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사도들과 유대교 관리들의 갈등과 충돌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사도행전4: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도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예수님과 부딪혔던 것도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시기 시작할 때 그 가르침과 더불어 갈등하고 충돌했습니다.
‑>유대교 관리들이 유일하게 막으려고 했던 사도들의 활동은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경고하고 엄금했던 것입니다.
‑>은혜를 전하고 아무런 값이 없는 복음을 전하는 가르침에 대해서 위협, 경고, 엄금했습니다.
‑>사도들은 왜 가르치려고 했을까요?
‑>우리가 보통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예수님이 위임하신 지상대명령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내면서 이르는 말도 명령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의 사자가 이르는 말입니다.
‑>(사도행전5:19‑20)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도들이 그 즉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칩니다.
‑>(사도행전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하므로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반응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목숨만 잃겠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행동에 대한 가장 어리석은 설명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전도, 예배, 기도, 감사가 명령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인간은 복종해야 한다는 설명은 인간이 한낱 피조물이니 그렇게 굴욕적이지는 않을 수 있지만 사실은 인간에게도 굴욕적이지만 하나님께도 모욕적이며, 기독교를 비인격적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지위와 권세를 명분으로 명령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일,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모르고 또 사도들에게 이루어진 일, 사도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 사도들에게 이루어질 일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기에 사도들이 옥에서 풀려난 것이 문제 해결로 보이고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보이고 사도들에게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행하신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행하신 일이고 우리에게도 행하고 계시고 우리에게도 행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사도들에게 이루어진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일입니다.
‑>(사도행전5: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옥에서 나온 사도들은 유대교 관리들에게서 가능한 멀리 도망하지 않고 주의 사자의 말대로 새벽에 동트자마자 성전으로 달려가서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장면 속에서 어떤 주저함이나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유대교 관리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5: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도리어 사도들은 다시 잡혀서 공회 앞으로 끌려와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가르칩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고 하나님만이 두려움의 대상이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두렵기에 순종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마땅하기에, 그것이 이치에 맞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기에 당연히 순종할 수밖에 없고 기꺼이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이들이 이토록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기준,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가르칠 내용, 가르칠 근거, 가르칠 확신이 있기에 가르치는 것입니다.
‑>옥에 갇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이 능욕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의 삶이 도리어 참되고 자신들의 사역이 오히려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변화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사도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말하라고 한 것은 명령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새로운 기준과 인식, 새로운 삶의 원리와 내용을 주셨다는 선언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가지고 있기에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사도들도 알고 있기에 사도들이 주의 사자의 말대로 곧장 나가서 가르친 것은 복종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이루어진 변화, 자신들에게 있는 새로운 기준과 인식, 새로운 삶의 원리와 내용을 알고 있기에 가능했던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을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공회를 향해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5: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자들 앞에서 너희가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함과 죄사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자신들도 예수를 죽인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예수를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심으로 자신들이 받게 된 회개함과 죄사함의 은혜를 알기에 그 삶을 실제로 누리고 있기에 가르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5: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성령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증인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일에 성령도 증언자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위협과 경고 앞에서도 담대하고 의연하게 더 정확하게는 아무렇지 않게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성도 됨을 알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을 향해서 참된 삶, 진리에 속한 삶, 하나님을 아는 삶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본질은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성도 됨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가면 사도들과 같은 놀라운 변화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열매로 맺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기준과 인식으로 새로운 삶의 원리와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이 사도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능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열매로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도 동일하게 쓰여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성도 됨을 알아가는 신앙의 본질, 그것을 우리가 회복하고 추구해 가게 해달라고 오늘 간절하게 주님 앞에 기도하시는 복된 기도와 묵상의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