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 말씀은(사도행전3:1‑10)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제목으로 상고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세'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정해진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고 하니 기도하려고 올라갔다고 단정짓고 그들의 능력의 근원이 정기적인 기도에 있었다고 교훈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율법적 종교와 전혀 다른 복음적 신앙의 원리를 보여주고자 유대교가 정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와 일반적인 종교는 매일 시간을 정해두고 기도하거나 특정 기간을 정해두고 금식을 한다든지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대부분의 종교가 갖는 특징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종교의 행태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외식입니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하면 되는데 필요하지 않을 때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을 두고 예수님이 외식이다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도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지만 기도 혹은 제사하러 갔다고 단정지을 만한 장면이 아니라 단지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문 2절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병자가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는 것이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나 늘상 있는 일입니다.
‑>지금 대사도들께서 가는 곳마다 이목이 집중되고 인파가 몰리는 상황이 아니며, 아주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사도행전 2장은 대단한 광경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는 사건이 아니었으며, 이들을 알아보거나 이들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병자만이 이들을 바라볼 뿐입니다.
‑>병자가 그들을 바라본 이유입니다.
‑>(사도행전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병자에게 일상은 구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3:4‑5)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보라고 하니 본 것이고 무엇을 얻을까 하여 구걸하기 위해서 바라본 것뿐입니다.
‑>이렇게 사실 확인을 먼저 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미하려는 우리의 성경 보는 버릇을 덜어내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해서 능력 받아 고쳤다, 병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알아보고 바라보아서, 자기의 문제를 고쳐줄 만한 자들을 바라보아서 고침을 받았다는 엉뚱한 교훈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 병자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구걸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단지 은혜 베풀어주기를 요청하는 행위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은혜를 구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그전부터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럴 만한 조건과 자격을 요구받았기에 정작 병자는 하나님의 성전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행위를 요구받으니 그 행위를 할 수 없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하나님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께는 은혜를 구하지 못하고 정작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아주 특이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지금 이 장면은 너무나 이상한 장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 모습을 소개하는 것은 죄의 기준과 원리가 작동하는 현장에서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변화된 성도의 원리가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확인시켜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라 할지라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리어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고 있는 현장 속에서 어떻게 예수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변화된 성도들의 다른 원리가 적용되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장면입니다.
‑>율법적 종교가 아닌 복음적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복음적 신앙이 우리의 삶에 가져오는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증명해 주기 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의 말과 행동 속에서 죄와 다른 하나님의 기준과 원리를 분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역시 사도들이 은혜, 능력 받더니 이렇게 예수님이 행하시던 치유의 기적을 행했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성령을 받은 이후에 어떤 다른 원리로 은혜가 필요한 자들을 대하고 있는가, 어떤 다른 삶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가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병자에게 자신들을 보라고 말했고 사전 조건과 사후 대가를 요구하거나 어떤 사전 행동과 사후 행동을 지시하지 않고 말 그대로 은혜를 베풀어줍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보였던 모습과 지금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행동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은혜를 베풀어주는 사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구걸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은과 금까지가 아니라 동전 몇 닢에 불과한데 굳이 자신에게 은과 금이 없다고 말한 의도는 내게 있는 것이 은과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은금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을 내가 너에게 아무런 값없이 줄 것이다 선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내게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베드로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란 단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 병을 고쳐주는 근원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그의 모든 이해와 경험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죄로부터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누리게 된 복음이 베드로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그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삶에 주어진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행복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기에 베드로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은혜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단지 그가 일어나서 걷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사람이 온전하게 된다는 복음을 선포하므로 성도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의 근거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고 자신의 삶이 예수의 이름, 예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기에 이 병자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께서 일해 주실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베드로의 말에서 첫 번째 핵심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걸으라'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더니 이제 권능을 받아서 병자도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 같이 정말 놀랍게 여길 만한 일이며, 당사자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일어나 걷게 되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에 이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모습을 가만히 떠올리며 생각해 보면 일어나 걷게 된 것이 유일한 강조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걸을 수 있고 뛸 수도 있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더 큰 문제를 모르면 직면한 문제가 가장 크게 보이나 더 큰 문제를 알면 작은 문제는 문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크고 본질적인 문제를 아는 것이 성도의 분별력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크고 본질적인 문제, 이 세상을 여전히 사로잡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죄' 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비참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죄' 입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선포했던 것처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패역한 세대에서 못 걸었던 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없으면 인간에게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행복이 없기에 걷게 된 것은 패역한 세대에서 걷는 것뿐이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걷지 못하는 것이 사소한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걷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사도행전 3장의 흐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묵상을 하면서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막 걷게 된 자와 본래 걸을 수 있었던 모든 백성을 향해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없이 함을 받는 것, 죄로부터의 구원이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결론이라는 것을 베드로가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 걷는 사건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걷게 되었으니 치유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서로 대조하는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 은과 금 그리고 내게 있는 것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두번째, 걷는 것과 은혜가 임한 것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어서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 하나님이 그를 돌보셨다는 사실이 그가 걸었다는 것보다 훨씬 귀하고 중하다는 설명입니다.
‑>걷는 것은 단지 걸을 뿐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은 사람들이 멀쩡하게 걸으면서도 여전히 갈구하는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혜를 받을 수 없었던 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은혜 받기를 구하고 있는 모습이기에 병자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못해 어처구니없게 다가와야 합니다.
‑>종교의 변질, 왜곡, 패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예수의 이름이 있으며, 그 예수가 병자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고 치유와 회복뿐만이 아니라 자유, 평화, 안식, 행복을 주는 오늘 장면을 분별하여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에게서만 복음이 나오는 장면을 바르게 바라보실 수 있기를 원하며, 이것이 진정한 변화이고 개혁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아는 것이 은금보다 귀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하는 것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일을 걷게 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가장 인격적으로 행동하고 가장 본질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장면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면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오늘 제자들, 사도들이 보여주는 성도의 다름을 바르게 분별하여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로부터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온전하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