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만유 하나님은 공의(公義)의 하나님입니다.
The Fairness and Justice of the GOD of All
공의(公義)라는 단어는 공평(公平)과 정의(正義)를 하나로 줄인 말입니다. 인간사회에 불공평하고 부정한 일들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분과 위치에 따라 불이익 차별을 당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당연히 그러하며 또 그런 방향으로 그분이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을 그분의 공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찌든 인간들이 사는 이 땅에선 완전한 공의가 실현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통당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생기며 날이 갈수록 즉, 인간이 죄로 타락할수록 더 빈번해집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통치에 잘못이 있거나 세상을 방임한 탓이 아닙니다. 인간끼리 각기 어리석음과 오류와 죄를 품은 채 무한 시기 경쟁함으로써 파생되는 필연적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는커녕 인간사회에 자기들이 제정한 법과 제도와 관습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해 인간적인 공의마저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사람이 그분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할 때에만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세상이 타락해진 것은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의 공의의 본을 보이고 불신세상을 이끌 책임이 있는 이스라엘의 잘못이 더 큽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최후심판으로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께서 바로 세웁니다. 지금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사태가 아주 혼돈스러워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져 가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구원(인간에겐 긍정적 결말)과 심판(부정적 결말)이라는 양 측면이 다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전보다 부정 없이 깨끗하게 될 수 있거나 아니면 계속 혼란으로 치달을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 하나님만의 공의는 엄연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사회의 공의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든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전혀 손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서라도 당신의 공의를 세웁니다. 아니 이 땅과 인류를 지금 당장 몽땅 멸망시킬지라도 그분의 공의는 눈곱만큼도 훼손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분 앞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미 예수를 믿어 그 분의 공의 안에 살고 있는 자는 그 심판에서 건져서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의에 비해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는 조금 다르게, 더 넓고도 완전한 의미로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공의 즉, 하나님이 악인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벌을 주어서 사회정의를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바로 세우는 일도 당신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도 그분의 의로움으로 인간이 그 계명대로 순전하게 살 때에 인간사회에 당신의 공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계명대로 온전히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또 다른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악인을 벌하기로 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도적 주도적 일방적 무조건적인 용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인간 죄의 형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대신에 죄인인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죄를 벌을 주는 것이 공의라면 죄인을 살려주는 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는 공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의입니다.
신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는데 자신의 공로나 자격이나 능력이 하나도 없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바꿔주실 성령님이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말하자면 인간사회의 공평과 정의,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자는 믿음을 가진 성도뿐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온전한 십자가 은혜가 실현되지 않았고 성령님도 각 개인에게 내주하지 않아 옛 이스라엘에선 하나님의 공의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가 되어서 그분의 공의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의롭습니다. 그분의 의는 영원토록 단 한 치도 줄거나 퇴색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의,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바로 세울 책임은 십자가로 의롭게 된 성도에게 있습니다. 성도가 죄와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며 정말로 의롭게 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 다른 죄인들로 회개하게 해야 합니다. 또 어떤 극악한 죄인이라도 그 사람은 주님의 긍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기어 십자가 예수님의 의를 덧입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벌 받아 마땅한 자를 벌 주는 것이 공의라면, 벌 받아 마땅한데도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이 그분의 의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9에서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의 공의란 사람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도안에서 선과 악의 개념으로, 천국 복음인 십자가의 도를 벗어나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환난을 주는 자와 환난을 받는 자가 있는데, 복음으로 말미암는 환난을 받는 자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형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과 악을 직접 다스리시는가? 모든 선과 악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지만, 율법으로 만들어지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세상 임금인 마귀를 통해서 역사하고, 진리의 천국에 속한 모든 역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을 주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에 아담을 통해서 형벌로 갚으시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환난을 받는 자는 예수에게 속한 자로서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8:36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도 요한1서 5:19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나라이고, 마귀가 땅에 주관자 곧 주인입니다. 반면에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고, 예수는 천국의 주관자 곧 주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5-47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 속한 자이고, 둘째 사람 예수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두 그릇이요 두 주인입니다.
새 언약인 십자가의 도안에서 이 두 주인을 분별하지 못하면, 두 주인을 섬기게 되고 결국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는 오직 진리와 사랑뿐이지, 진노 저주 살인 시기 질투 원망 불평등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땅에 주인 아담과 하늘에 주인 예수! 이 두 주인 중에 누구를 따르고 섬기느냐에 따라서 믿는 데로 이루어짐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의’(義)를 전가하셨으며, ‘보혈의 공로인 십자가의 도 곧 천국 복음’을 밝혀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십자가였을까요? 왜 하나님은 간단히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너희가 내게 죄 지은 것을 안다. 지금 당장 용서하겠다. 괜찮다. 나는 너희 모두를 용서한다!”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순종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벌과금을 지불하거나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하여 벌과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표준 성경 로마서 3:25에서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 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줍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했습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의로운 요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인류를 사랑하고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