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새벽말씀
다니엘 4:19~37
느부갓네살왕이 또 한 번 꿈을 꿉니다.
그 꿈은 제국의 강력한 왕을 단번에 옭아매었습니다.
어제 묵상의 본문이었는데요.
다니엘 4장 4절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라고 합니다.
꿈은 평강할때, 세상기준에 아무문제 없을때
그때 찾아왔는데요.
4장5절 '한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였으니~'
이것이 사람입니다. 인간이지요.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는
제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간밤의 꿈 하나로
이렇게 무너져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마음의 샬롬은 이처럼
인간의 마음, 인간의 강함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고 우리 삶의 실제적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뭘해도 마음의 평강을 얻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본래 하나님으로만 만족을 하고
하나님으로만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자가 하나님을 떠났으니 심호흡을 해보고 산책을 해봐도 불안함, 두려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이겠지요.
모든 사람들 속에는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 구멍을 채우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땀흘려 노력하는데요.
이 구멍은 하나님 모양의 구멍이라고 합니다.
신학자 들의 이야기예요.
하나님 모양의 구멍이 있어서 하나님 만이 채울수있는
구멍이라고합니다.
채우심이 있을때에
비로소 샬롬! 평강을 누릴 수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할 때
가장 유일한 길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무언가를 애써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는 그곳에 침잠하는것.
그냥 거기에 '푹' 잠기는 것이거든요.
어떤 설교자, 어떤 찬양인도자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예배자체가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시간이고
그 예배 자리에 있을 때에 내가 무언가를 했기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때문에
우리 마음의 그 구멍이 채워집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 어떤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던 것이,
불안함의 문제가 아~이때 해결되는 구나 분명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 하나로 무너집니다.
이때 다니엘이 나타나서 한번 더 꿈을 해석해주죠.
두번째 꿈, 두번째 해석입니다.
꿈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어제 본문에서 살펴보았었죠.
나무가 하늘까지 자랍니다.
모양은 아름답고 열매는 너무 풍성합니다.
땅끝에서 알아볼 정도로 아주 강력하고
아름다은 나무.
그때 한 순찰자가 한 거룩한 자가 나타납니다.
그가 나무를 베고 자르고 잎과 열매를
다 헤쳐버립니다.
그리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서 7대를 지내게 되리라는
내용이었지요.
이 꿈을 다니엘이 다시 한번 해석해 줍니다.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이었죠. 그는 세상 모두가 두려워할
강력한 왕으로 우뚝섰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나 곧 사람들에게
쫒겨나 짐승같은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두 가지를 보십시요.
꿈을 꾸게했고 꿈을 해석해 주십니다.
이것을 왜 느부갓네살 왕에게 행하시는 걸까요?
교만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교만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꿈을 꾼지 12달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신거라고 볼 수 있겠지요.
꿈대로 즉시 행하지 않고 12달 지나서입니다.
그때 느부갓네살 왕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30절 말씀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보라 이 바벨론 왕국은 다 내 능력때문이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적 교만이죠.
지난 주일 오전예배에서 우리는
칭의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진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의롭지 않음에도
'너는 의로워' 라고 여겨주시는 것인데요.
나의 행위 나의 업적으로 내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것.
그것이 칭의의 은혜입니다.
내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행하심에 집중하는 것,
인간적으로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의 상식은 '내 행위가 곧 나야' 라고 보기때문입니다.
칭의는 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삶이 이루어질때만
우리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만이 참된 인간,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될 수있습니다.
교만에 취할때 어떤일이 벌어집니까?
31절 같이 보겠습니다.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한참 교만해져있을때 하나님이 그를
비로소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흔드시고
무너뜨리시고 낮추실때가있습니다.
폭삭 무너질때가 종종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지게하는 것이 최종목적은 아닙니다.
왜 무너지게 하시냐면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내용인데요.
대표적으로 2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이것입니다. 깨닫게 하기위해서
느부갓네살 왕이 회복된 이후에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찬양합니다.(34절이하)
여러분 우리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요.
나를 지우고 오직 주님만 드러나게하는것.
내 삶이 다 주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영성입니다.
나는 끊임없이 사라지고 주님만 드러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 본래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드립니다. 내 것 중 일부를 떼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때문에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헌금의 참된 정신은 내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헌금의 정신 입니다.
헌신도 봉사도 그렇습니다.
내 시간 내 힘을 드리는 것이 아니며
시간과 힘을 주님께 되돌려 드립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헌금과 헌신은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며
나를 철저히 지워가는 여정입니다.
여러분 우리속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습성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그 교만함을 이 시간 철저히 회개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꿈으로 말씀하시고 해석으로 기회를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깨달음의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내 속의 느부갓네살의 습성들
교만의 마음들.......
깨달음의 은혜를 주실때 반응하셔야 합니다.
교만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 삶에서 주님을 몰아내는 것. 그래서 샬롬이 없는 것 입니다.
교만이 나를 계속 세우는 것이라면
기독교 영성은 자꾸만 나를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나를 지울때 우리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자꾸만
나를 세울때 느부갓네살 왕처럼 짐승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습은 어떤것입니까?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아름다운 존재로 나아가기위해
끊임없이 우리속에 있는 교만을 잘라내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복된 새벽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